일제 강점기 대 히트를 쳤던 고무신, 고무신이 대박난 이유

고무신은 1910년대부터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나름 최신식 고급으로 통했다.


조선의 순종임금도 신으셨다가
그 출중함에 반해버린 신발이기도 하다.


당시 신문에는 이런 식의 광고가 많았다.

순종이 정말로 고무신을 신었는지는
확인할 순 없지만, 다른 회사도 비슷한 광고를 했다.


"만월표 고무신이야말로 이강 전하가 손수 고르시고,
신고 계신 신발이다."


여기서 '이강 전하'는 고종의 둘째 왕자요
순종의 아우였던 의친왕을 말한다.


그가 특별히 거론되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반일 마케팅이 먹혔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거북선표 고무신도 등장했다.

바닥에 미끄럼 방지 기능도 갖춘 최신식 고무신도 있었다.

거북선이라는 명칭 역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건드려서
신발 판매에 연계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1996년 2월 22일자 조선일보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이 실려있다.

거북선표 고무신은 워낙 인기가 있어서,
나중에는 유사품 주의 광고를 해야했다.


짚신을 대체한 고무신! 그렇게 등장한 고무신은 빠른 시간 내에
대중적인 신발로 자리 잡게 된다.


고무신의 장점은 무엇보다 질긴 내구성에 있었다.

질긴 고무신, 별표 고무신!!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 고무신은 찢어지지 않았으며,
뒤축이 닳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1년 사용을 보증했다.


버선에 흙이 묻지 않고, 가벼워서 신기 편한 고무신이었다.

이와 같은 광고는, 고무신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짚신의 단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강철보다 견고한 지구표 고무신은 사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평균 5일 신으면 닳아 없어져버릴 만큼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한 사람이 보통 일 년에 70켤레의 짚신을 신었는데,

게다가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착용감이 좋지 못했고 비만 오면
스펀지처럼 물기를 빨아들여 축축한 데다 쇠망치처럼 무거워졌다.


특히 측간이나 더러운 곳에 신고 들어가면
발이나 버선이 쉽게 오염되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반면 고무신은 여러 장점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내구성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비싸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양반들이 신었던 가죽신보다 훨씬 저렴했다.

또 비가 와도 나막신으로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가볍고 착용감 또한 좋았다.

당시 순사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의 신발이 고무신이다.

다만 벗겨지기 쉽고 내한성이 전혀 없어
겨울에 신기에는 불편함이 많았지만, 이는 짚신도 마찬가지였다.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대중들의 눈길을 크게 끌지는 못했다.


당시 고무신은 오늘날 구두 모양이어서
그런 모습에 사람들이 낯설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조선 사람이 신던 신발을 흉내 내서 팔았더니

이게 웬걸!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남자 고무신은 짚신을 본뜨고,
여자 고무신은 갖신을 본뜬 게 주효했다.


그렇게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우후죽순으로 고무신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21년에 2개이던 공장이
1933년에는 72개로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한편 고무신 수요가 급증하던 1920년대에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서양식 구두도 속속들이 들어섰으니


당시는 이런 서양식 구두를 두고
'세계 개조'라는 거창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화점의 구두 한 켤레 값이 12~13원 정도였다.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이 20원이 채 되지 못할 때였으니,

양화점 구두를 신는 여인네들을 두고 벼 두 가마니를 신는다고 해서
용맹스러운 여자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그의 밤에 고무신에 가격은 9

그에 반해 고무신의 가격은 구두의 1/30도 안되는, 40전이었다.

당시 짚신이 10전, 미투리가 25전이었을 때였다.

또한 여성들의 로망으로는 흰고무신을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서민들이 고무신 정도는
마음 놓고 신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920년대 신문기사를 보면
고무신 절도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1924년 2월 인천에서는 고무신을 훔치다가
점원에게 붙들려서 매를 몹시맞아


혼수상태가 되어 병원에 입원한 아이의 사연이 있기도 하다.

고무신의 가격이라고 해봤자, 짚신의 3~4배 값밖에 안 됐지만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어서

여전히 짚신을 신고 다니거나
아예 맨발로 다니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18세기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맨발 차림이 간간히 보인다.

한편 거무튀튀한 일반 고무신과 다른 새하얀 흰고무신은
나름 고가의 신발로 평가받았으니,


특히 시골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물품과도 같았다.

마치 요즘의 페라가모와 같은 명품 구두라고나 할까?

김유정의 단편소설 '금따는 콩밭'의 내용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순이는 밤새도록 흰고무신을 신었다 벗었다 했다.

신 코가 뾰족한 것도 신기하거니와 휘어잡으면 한 움큼 되었다가도


신 코가 뾰족한 것도 신기하거니와 휘어잡으면 한 움큼 되었다가도

손을 놓으면 팔딱 제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흰고무신을 갖게 된 순이는 하늘로 올라간 듯이 기뻤다.

순이가 생각하기에 흰고무신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라도
함부로 신을 것이 못 되어 보였다.


아랫마을에도 흰 고무신을 신은 여편네라고는
구장댁 한 사람뿐인 것만 보더라도 분명히 귀한 신발임에 분명했다.


1937년이면 도시민들은 대부분 고무신을 신었던 시절이었지만

흰고무신 정도면, 시골의 순박한 여인네에게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드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무신이 잘 나간다고 해서 고무신 공장의 노동자들까지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무신 공장엔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의 3배 가까이나 됐는데
이들의 노동 조건은 가히 끔찍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1932년 고무신 공장을 탐방한 기자의 글을 보면 경악스러울 정도다.

1932년 월간 신동아 6월호의 내용을 살펴보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고무 찌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마문이 열리자 130도나 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쩌진
고무신들이 지독한 냄새를 피우며 쏟아졌다.


그 옆에서 하루종일 그런 냄새를 맡으며
일하는 꽃같은 여공들이 있었다.


롤러를 잡고 고무신 바닥을 눌리는 그녀들의 얼굴은
금새 붉어지고 팔에는 힘줄이 굵어진다.


옆에서는 그녀들의 아이들이 젖을 달라고 보채기도 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만큼 고약한 고용주들도 문제였으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고용주를 위해 고기를 사다 바치거나,

빨래까지 해주어야 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고용주나 공장장의 눈에 거슬리게 되는 날이면
그날로 공장을 쫓겨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에 일거리는 부족했고,

실업자들은 득실거렸다.

공장에서 욕설과 구타가 난무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그보다 힘든 것은 '불량품 배상제도'였으니,

불량품이라도 나올 경우 노동자들은
정품 한 켤레 분의 임금을 받지 못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열악한 시설에서
하루 12시간이 가까운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란, 일반 봉급자들의 60% 수준인
월평균 12원 70전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조악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 짚신의 시대로 돌아가고만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국내의 고무 산업은 크게 휘청거렸다.

동남아에서 수입되는, 고무의 유입이 중단되면서

고무신 값은 전년의 3배로 올랐고

그나마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품귀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1인당 1년에 한 켤레만 사 신을 수 있는
'일족 구입권'이라는 배급표를 나눠주게 된다.


때문에 당시에는 찢어지거나 구멍나면 기워 신어야만 했고

불에 달군 쇠틀로 찢어진 고무신을 녹여 붙여주던
방랑 수선공이 때아닌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원료난은 더욱 심각해지고

귀한 고무는 군용품을 조달하기에도 벅찼으니,

당시 고무신은 쌀 한 말과 교환될 만큼 귀하신 몸이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재빨리 짚신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국 학교에 짚신을 신으라는 훈령이 떨어지는가 하면

소학교에서는 앞다투어 '전교생 짚신 신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다시 짚신과 나막신이 전에 없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결국 짚신은 해방이 될 때까지 대량으로 생산 유통되었던 것이다.

검정 고무신은 평등을 상징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고무신은 신발 점유율의 85%를 차지하던
국민 신발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 평등사상이 만연해진 가운데,

검정고무신은 그런 평등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과도 같았으니,


웬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면
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조선역사
#역사다큐
#수면다큐
일제 강점기 대 히트를 쳤던 고무신, 고무신이 대박난 이유